있는 그대로가 완벽한 것이다_by 성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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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때였다. 이른 아침, 비몽사몽간에 받은 전화에서 쏟아지는 고교 동창의 다급한 목소리는 잠을 확 달아나게 했다. 친구가 술자리에서 쓰러져 실려갔다는 것이다. 갑작스레 추워진 날씨 덕분에 코트를 챙겨 입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차 안에서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고작 30대 초반인 그 친구가 죽었다는 것이다. 사인은 뇌졸중에 속하는 뇌출혈이었다.





십 여 년 쯤 전 이맘때였다. 맹장수술로 입원한 할머니께 겨울 이불을 챙겨 드리고 오신 아버님이 한숨을 푹푹 쏟아냈다. 할머니께서 풍을 맞았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왼쪽 팔다리를 못쓰게 되었다. 풍이 겨울 바람이 아니라 뇌출혈을 가리키는 말이었다는 사실은 후에 알 수 있었다. 뇌졸중을 다룬 영화 플로리스를 보고 나서 떠오른 두 사람이었다.

이맘때의 겨울을 알리는 찬바람은 한편 낭만과 설레임이지만, 길거리로 밀려난 노숙자들 이나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노인들에게 있어서는 죽음의 그림자다. 노숙자들은 언제 동사 할 지 모르고, 노인들은 언제 쓰러질 지 모르기 때문이다. 찬바람을 만나면 멀쩡하던 사람도 쓰러지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특히 노인들의 경우에는 특별한 일이 아니다.

누구든지 갑자기 찬 공기에 노출되면 혈관이 좁아지며 혈압이 급상승되기 마련인데, 평소 혈압이 높거나 심장에 문제가 있던 사람의 경우에는 이런 현상이 곧바로 심근경색이나 뇌출혈로 이어지는 것이다. 작년에 죽은 그 친구는 혈압이 170까지 나왔고 몸무게가 100kg이 넘던 고지혈증이었다. 십여년 전의 할머니는 수술시간 내내 추위를 호소했다고 한다. 그 때의 대학 병원은 요즘처럼 따뜻하지 않았다. 달랑 수술복 하나 입혀놓고 응급실에서 수술실에서 10시간 넘게 떨고 난 다음, 할머니의 뇌혈관은 터졌다. 물론 할머니 혈압도 평소 150이 넘는 요주의 상태였다.





영화 플로리스에서 월터(로버트 드 니로 분)가 뇌졸중에 걸리게 되는 상황에서는 추위도 한 몫 하지만 더욱 큰 역할을 총기 난동이 하고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 월터네 윗집 사는 창녀 남자 친구가 갱인 Mr. Z의 돈을 턴다. 화가 치민 Z는 부하들을 풀어 월트의 윗집을 덮치고 총을 쏴댄다. 남자로, 그래서 불의를 참지 못하도록 교육받은 월터는 한밤중에 들리 는 총성과 싸움소리에 총 하나를 갖고 뛰어 올라가다가 그만 뇌혈관이 터지는 것이다. 총기 난동과 같은 급박한 상황은 찬바람처럼 혈압을 갑자기 상승시키기 때문에 뇌졸중 발생 위험 인자들(고혈압, 심장병, 흡연, 당뇨병, 고지혈증, 과다한 스트레스, 60세 이상 연령 등)을 가 지고 있는 사람이 이런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면 당연히 쓰러지게 된다. 그럼, 월터가 가진 뇌졸중 발생 위험인자들은 어떤 것이었을까?

월터는 연금 생활자지만, 퇴역 해군인 전에는 우수 경비원이었다. 인질을 14명이나 구하고 용감한 시민상까지 받은 뉴욕 이스트 사이드의 영웅이다. 하지만, 아내는 바람이 나서 그의 돈을 들고 도망갔고, 함께 상을 수상했던 친구는 그의 계좌에서 20만불을 빼돌려 잠적했다. 돈은 바닥나 가고 혐오스러운 게이들이 아래 위층에서 시끄럽게 굴고... 그에게 있어 유일한 즐거움은 일주일 한 번 댄스 클럽에서 캐런을 만나 춤추고 같이 자는 것이지만 그녀는 뜯어 낼 돈이 있기 때문에 그와 만나줄 뿐이다. 그는 남자답게, 강한 척 사는 것만 배워왔기에 이 모든 아픔을 누구에게 털어놓는 적이 없다. 내색조차 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이 그에게 선물한 것은? 늘 인상을 쓰고 다니는 그의 모습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과다한 스트레스가 그것이다. 스트레스는 뇌졸중을 일으키는 주요 위험인자 중의 하나 이다. 얼마 전, MBC의 한 다큐멘터리에서 스트레스 시 발생하는 물질을 토끼에게 주사하는 실험을 하는 것을 본 적 있었다. 토끼의 모세혈관은 순식간에 가늘어지기 시작하더니 급기 야는 사라지고 말았다. 니코틴을 주사했을 때와 거의 다를 바 없는 결과였다.





작년에 죽은 친구는 죽어 가는 아버지의 병간호를 6개월 넘게 하면서 회사에서 큰 프로젝트를 하나 맡고 있었다. 아버지의 사형 선고와 회사 프로젝트 좌절... 이 두 사건이 가져다 준 스트레스가 그 친구의 뇌혈관을 파열시키는 데 추위와 더불어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원래부터 성미 급했던 할머니는 맏손주의 대학 입시 때문에 상당한 스트레스 상태에 있었다. 잘 체하지도 않는 분이 맹장이 걸리신 것도 이와 무관해 보이지 않았다. 스트레스와 과로는 맹장염 유발 요인 중 하나이며 동시에 뇌졸중 위험인자 중 하나인 것이다.

이런 월터에게 게이 클럽의 가수이자 사회자인 아랫집의 러스티(필립 세무어 호프만)는 당연히 멸시를 받을 수밖에 없다. 학창시절 우연히 대타로 백설공주가 되어 무대에 선 다음 부터 자신이 남자 속에 갇힌 여자라고 생각하는 그는, 성전환 수술을 받아 트렌스 젠더가 되는 것이 꿈이다. 그, 아니 그녀에게는 애인이 하나 있는데 유부남인 그는 폭력을 행사하며 열심히 노름 밑천을 뜯어낸다. 자기가 완전한 여자가 아니기 때문에, 남자 친구가 괴로워하 고 있다고 믿는 러스티는, 그에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돈 모아 수술 받고 나면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결코 다 잘 될 리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 그녀 하리수 처럼 예쁘지도, 몸매가 늘씬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월터가 표현한 대로 못생긴데다 뚱뚱한 불완전한 여자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래도 그녀는 여자가 되고 싶다.

이 두 불완전한 사람이 뇌졸중 때문에 만난다. 월터는 오른쪽 반신이 마비되어 춤은커녕, 걷거나 말을 똑바로 하는 것도 어려운 상태에 빠져 있다. 동네의 영웅이던 그는 난데없이 전화도 받지 않는, 아니 받을 수 없는 은둔자의 생활을 하게 된다. 자기 연민과 자기 비하에 허우적대던 그는, 담당 물리치료사의 권유에 따라 언어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노래교습"을 받기로 결심하게 되지만, 집 밖으로 나가다 빙판에 미끄러지고... 생각다못해 그는 그렇게도 혐오하던 러스티를 찾아간다. 하긴 아파트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노래를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으니까... 둘은 불편한 공생관계에 돌입한다. 아파트 밖은 때려 죽어도 못 나가는 왈트와 성전환 수술을 위해 돈이 필요한 러스티... 천하의 앙숙인 둘을 숙명적 공생 관계로 묶어놓은 시나리오의 설정 속에서 왈트와 러스티는 서로에게 측은지심을 느껴 가며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이는 차츰 우정으로 발전해 나간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여기서 나온다. 러스티는 노래교습의 마지막 날, 실제 로는 성전환 수술을 받기 위해 도망갈 계획이어서 교습을 그만두었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마지막 날 멋진 깜짝 파티를 연다. 여기엔 흑백도 없고, 나이 차도 없고, 남녀도 없다. 성적 경향의 차이나 취향의 차이도 없다. 같은 인간끼리 진심으로 축하하고 즐길 뿐이다. 비로소 월터는 외로움에서 벗어난다. 월터는 웃는다. 그의 일그러진 웃음은 외로움에서 벗어난 참된 인간의 얼굴이다. 마비 상태든 아니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얼마나 후련하게 웃을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일그러진 드 니로의 웃음을 보면, 정말 대단한 배우란 걸 깨닫게 된다.)

비로소 그는 늘 강한 척 폼 잡고 있는 데서 벗어나게 되며, 진실로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를 알아볼 수 있게 된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 주는 사람들 앞에서 가장하고 위선을 떨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며, 남도 역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닫게 된다. 때문에 그는 러스티가 갱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자신을 이용했 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를 구하기 위해 다시 한번 목숨을 건다. 갱들을 소탕, 다시 영웅이 되지만 월터는 예전과 다르다. 그는 있는 그대로 남을 받아들일 줄 알게 된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이 영화의 제목이 플로리스인 이유를 알게 된다. 플로리스는 다이아 몬드 중에서 최고 등급, 전문가가 10배의 확대경으로 샅샅이 뜯어봐도 흠이 발견되지 않는 최고의 다이아몬드를 말하는 단어인 것이다. 다시말해 완벽함 (perfect)을 의미하는 것이다.

뇌졸중에 걸린 환자도, 게이도, 뇌성마비 환자도, 문둥병자도, 나치도, 유태인도, 모슬림도 그 누구도 플로리스, 즉 완벽한 존재다. 이 세상에 불완전한 존재란 없다. 신은 불완전한 것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후 어떤 변화가 있었다고 해도 그 나름대로의 깨달음을 가질 수 있다면, 결코 그는 불완전한 존재가 아닐 것이다.

뇌졸중은 게이 가수라는 설정과 더불어 이 영화에서 일반적 인식 속에서의 불완전함을 보 여 줌으로 오히려 모든 것이 완벽함을 보여준 중요한 설정이었다. 사실 뇌졸중의 심각함은 그 엄청난 사망률에 있는 것이 아니다. 월터처럼, 충분히 재활 치료를 통해서 다시 건강을 찾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고 자기 비하나 자기 연민에 빠지게 하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죽음은 상당부분 문제를 마감하는 성격을 지니지만, 살아남은 인격 장애자는 계속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래서 뇌졸중의 치료 중엔 정신과 치료가 포함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이런 치료가 거의 행해지지 않거나 소홀하게 다뤄지는 게 현실이다.

뇌졸중은 암과 더불어 우리나라 사망 원인의 1,2위를 다투고 있다. 하지만, 뇌졸중에 대한 우리의 대처는 형편없다. 뇌졸중은 사실 병의 원인과 징후를 숙지하고 미리 예방을 잘 하면 얼마든지 피해갈 수 있으며, 설혹 발병했다 해도 꾸준하고 과학적인 재활치료를 통해 얼마 든지 좋아질 수 있다. 미국에서는 뇌졸중에 대한 각종 지식들을 방송과 각종 사회 캠페인을 통해 국민들이 충분히 숙지할 수 있게 했으며, 헬기를 동원한 응급처치 및 수송 시스템을 갖추어 발병자가 2시간 내 병원에 도착할 수 있는 비율을 높여, 효과를 보고 있다고 한다.

작년에 죽은 친구는 술집에서 쓰러졌음에도 병원에 도착하기까지 무려 세시간이 넘게 걸렸 다. 손을 쓸 기회를 거의 놓쳐서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극심한 두통과 말이 어눌해 지는 상황을 눈앞에서 지켜보면서도 그것이 위험한 상태인지 전혀 몰랐던 무지에도 물론 큰 책임 이 있다 하겠다. 병원에서 노인 환자를 발가벗겨 놓는 것 역시 무지(혹은 무책임)의 소산은 아닌가

하지만 진실로 안타까운 것은, 뇌졸중을 양산시키는 폭력적인 경쟁 체제를 옹호하며 뇌졸 중 환자의 부양을 오로지 가족에게만 떠넘기는, 그야말로 살인적인 무관심으로 무장된 이 한국 사회이다. 이 한국 사회가 과연 플로리스 같은 영화를 낳을 수 있을까? 트렌스젠더 쪽은 하리수를 보더라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고? 천만에. 하리수는 여자가 된 남자가 아니라 상품이 된 남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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