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매혼_by 성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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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매매혼
  겁탈혼 이후 나타난 결혼 형태는  매매혼이다. 매매혼이란 사유제  혼인의 대표적인  형식으로
남자 쪽에서 많은  양의 재물을 지불하고 여자 쪽의  부녀자를 취하는 교역 방식을 특징으로  한
다. 고대 전설 속의 복희가 암수 한 쌍의  사슴 가죽을 결혼 예물로 한 것은  겁탈혼이 매매혼으
로 변화했음을 의미한다. 고대 사람들은 가죽을 화폐로 사용했기 때문에  사슴 가죽은 사실상 매
매혼에서 필요한 재물에 해당한다.
  사유제가 형성됨에 따라 상품  교환 또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처는 예절을  갖춰  맞이하였
지만, 첩은 임의로 매매할 수 있었다.  잉으로 얻은 첩은 고급 귀족의 특권이 있었으므로 매매가
불가능했지만, 이와 달리 야합을 통해 얻은 첩은 쉽게 팔고 살 수 있는 상대였다.
  매매혼은 특히 한대에 유행하여  황제는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쉽게 볼 수 있었다.
[주례]와 [예기]를 보면, 천자, 제후, 백성들이 결혼할  때는 빙금, 채례에 관한 규정이 있다. "
황제가 황후를 맞이할  때는 황금 만 근을 빙례로 했지만,"  이를 훨씬 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서한 말, 평제는 왕망의 딸을  황후로 맞으면서 황금 20만 근, 은  10만 근을 보내  사람들을 놀
라게 했다. 이런 사치스러운 기풍은 동한 때에도 여전히 지속되어 제후,  선비, 서민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예"에서는 첩을 사는 행위를   허락하였다. [회남자,도응훈]에 이런  기록이 있다. 노나라의  
 
법률에는 누구든지 각국의 첩이 되어 흩어져  있는 부녀자를 사서 돌아오면 관청에서  상을 준다
고 했고, 공자의 제자 자공이 많은 수의 노나라 여자를 사서 돌아왔다고  한다. 정부에서 특별법
을 제정하여 국외에서 첩이 된  사람을 사오는 것을 장려햇음은 밖에서 첩이  된 자의 수가 많았
음을 알 수 있는 예이다. 예의지국이었던 노나로  또한 이와 같았으니, 다른 나라의 상황은 미루
어 짐작할 수 있다. 어떤 경우는 제후국에서 궁궐의 아름다운 첩을  이용하여 정치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기도 했다. 한나라 통치자는   강대한  전나라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많은  양의 돈을 
 
 
진나라에 주기로 결정했지만, 가난했기 때문에 궁궐의  미녀를 보내 강화를 청했다. 또 위양왕은
초나라와의 여맹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절색 미녀를 선발하여 초회왕에게 보내  첩이  되도록 했
다. 또 진무왕은 서융을 위로하기 위해 100명의 미녀를 보내기도 했다.
  매매혼은 쌍방 가정의 이익에 치중하여 혼인 당사자들의 의사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따
라서 남녀간의 애정 위에서 행해진 결혼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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